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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 포럼 번역/1986년

1986년 7~9월

1986년 7월 공연에서 있었던 일

 

1986년 7월 11일, Troubadour에 건즈가 돌아오다!

Troubadour에서 7월 11일 공연이 결정되었다. '건즈 앤 로지스'라는 이름으로 한 첫 공연이었으며, 팬클럽 회지에도 언급된다.

'1986년 7월 11일 금요일 오후 10시에 건즈 앤 로지스가 Troubadour에서 새로운 곡들로 공연해. (우리 원래 이름으로)
'FARGIN BASTIGES'라는 가명으로 이곳저곳에서 공연을 하고 다녔는데, 결국... 너네가 기다리던 진짜 신나는 "GUNS N' ROSES"의 공연이야. 신날 테니까 빨리 와!!!'

 

이날 그들은 2천5백 달러를 받고, 새로운 곡들로 90분 간 공연했다.

 

1986년 7월 21일, 슬래쉬와 이지가 지각하다

7월 21일 Bogart's 공연에 슬래쉬와 이지가 늦게 도착한다.

 

1986년 7월 24일, 액슬이 그만두고 해고당하다

그다음 공연은 7월 24일 Club Lingerie에서였다. 마크 캔터 말로는 액슬이 당일 오후 밴드를 나갔고 해고당했지만, 결국 공연에 임박하자 다시 함께 무대에 올랐다고 한다.

 

슬래쉬 : 우린 해체한 게 아니라 그냥 대화를 나눴을 뿐이야. 많은 걸 해결했어.

 

액슬 : 그날 많은 충돌과 의견 불일치가 있었어. 그 공연이 정말 최악의 공연 중 하나였다고 생각해. 그래도 다음날 잘 해결했어. 우리가 여기서 그만둬버린다면, 그 이후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런 문제가 많았으니까. 우린 여러 번 폭발하고 싸우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와.

 

나중에 슬래쉬는 그 날 자기와 액슬 사이에 큰 다툼이 있었고, 심각했었다고 밝힌다.

 

슬래쉬 : 액슬이랑 싸우고 우린 그만두려 했어. 그 공연에 선 이유는 톰 주토트가 올려 보냈기 때문이었어. 나는 공연 내내 내 앰프만 보고 서있었고. 생각해 보니까 톰이 어떻게 우릴 같이 무대에 올려 보낸 건지 모르겠다.

 

공연 중에 액슬은 다시 톰을 언급하며 감사의 말을 전한다.

 

1986년 7월 31일, Timber's Ballroom 액슬의 지각

그런 일이 있고 불과 일주일 후인 7월 31일 Timber's Ballroom에서(더프는 3월 31일 Fender's Ballroom에서 일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액슬이 너무 늦었고, 제시간에 시작하지 못하면 돈을 받지 못한다는 말 때문에 밴드는 그를 빼고 시작해야 했다.

 

라즈 큐 : 무슨 생각인진 모르겠다만 액슬은 종종 공연 시작 시간에 임박해서 클럽에 도착하곤 했다. 건즈의 공연 시간은 그만큼 줄어들었고, 멤버들과 관중 모두 화가 난 상태로 공연에 임했다.

 

더프 : 돌이켜 생각해보니 우린 늦은 액슬을 빼고 공연한 이날, 나중에 벌어질 문제의 씨앗이 뿌려지는 걸 본 걸지도 모르겠다.


1986년 7~10월, EP를 제작하다

 

1986년 여름, 밴드는 데뷔 앨범의 프로듀서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뭐라도 하려고 밴드와 회사는 한정판으로 부틀렉 앨범을 발매하기로 결정한다. 이 앨범은 그들이 곡을 쓸 시간을 더 주고, 팬들을 늘릴 목적이었다. 1986년 7월에 나온 회지에는 이 한정판 앨범은 부틀렉 앨범이며, 이달 말에 발매될 거라고 나오지만 발매되지 않았다.

액슬은 7월 11일 무대에서 곧 나올 거라고 말한다.

 

액슬 : 잠깐 얘기 좀 할게. 지금 우리가 뭘 하고 있는지 말해주고 싶어. 게펜이랑 앨범을 작업하는데 꽤 긴 시간이 걸릴 거야. 그래서 그동안 여기 있는 너희들한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게펜에서 앨범을 내기 전에 우리가 만든 독립 레코드사에서 앨범을 하나 낼 거야. Uzi Suicide 레코드사야. 이건 한정판으로 몇 장 안 찍을 건데, 그냥 너네가 이걸 알아두면 좋을 것 같아서 말했어.

 

8월에 그 한정판 부틀렉 앨범은 'Live! Like a Suicide'라는 이름이 붙는다. 그리고 10월 31일 액슬은 EP가 완성되었다고 말한다.

 

액슬 : 우리가 계속 말하고 있는 그 EP 오늘 다 만들었어. 커버도 다 만들었으니까 이제 인쇄해서 포장만 하면 끝나. 2주 뒤면 볼 수 있을 거야.


스펜서  프로퍼와 파샤 스튜디오 데모

 

여름이 지나고, 게펜은 스펜서 프로퍼를 고용했다. 밴드와 합이 잘 맞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데모를 녹음하기 위함이었다. 프로퍼는 멋진 사운드를 만드는 재능이 있었다.

 

스펜서 프로퍼 : 그들의 음악은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다. 대단한 에너지랑 열기가 있었고, 메탈 장르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킬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액슬은 엄청난 퍼포머였고, 슬래쉬는 최고의 기타리스트였다.

 

밴드는 프로퍼 소유의 파샤 스튜디오로 갔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 밴드는 본인들이 원하는 사운드로 만든 믹스테이프를 프로퍼에게 건네주었다. 그 테이프는 'Spencer's Easy Listening'라고 불렸고, 프로퍼로 하여금 사운드의 방향을 쉽게 찾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프로퍼와의 작업은 얼마 안 가 끝나고 만다.


1986년 8~9월

 

8월 15일 The Scream, 8월 23일 Whisky A Go Go에서 공연한다. 16일에는 Orange County에서 공연이 잡혀있었지만 취소했다고 한다.

8월 23일 위스키에서 'Sweet Child O' Mine', 'Mr. Brownstone', 'Ain't Going Down'을 불렀고, 이 날은 슬래쉬가 그의 상징인 모자를 쓴 첫 공연이었다.

 

슬래쉬 : 그 공연은 내가 탑햇을 쓰고 나온 첫 번째 공연이라 절대 잊지 못할 거야.

 

그날 'Mr. Brownstone'을 부르기 전, 액슬은 헤로인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며 '그만둬야 할 거야'라고 한 마디 한다. 당시 슬래쉬와 이지는 헤로인 중독으로 밴드에 영향이 갈 정도였다.

 

8월 30일 산타모니카 Civic Center에서 테드 뉴전트와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공연 전 슬래쉬와 이지는 다른 밴드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는데, 마약 때문에 지각하고 만다.

 

슬래쉬 : 샌프란시스코에 갔다가 아파트로 돌아와 보니까 마약이 하나도 없었어. 대니가 내 헤로인을 다 훔쳐갔는데, 그걸 안 말해줘서 우린 집 구석구석 다 찾아야 했어. 찾느라 정말 힘들었는데, 딜러가 연락이 안 돼서 더 죽을 맛이었지. 점점 견디기 힘들어졌고, 마침내 데시의 친구 중 한 명이 소량의 약을 구했어. 걔가 있는 이지의 낡은 아파트로 가서 약이 돌 때까지 기다렸고, 빨리 차에 타서 공연장으로 갔지. 공연 시작 5초 전에 도착했던 것 같아. 정말 큰 공연이었기 때문에 진짜 무서운 순간이었어.

 

9월 5일, 액슬과 주토트는 MTV 뮤직 어워드에 참석한다.

9월 13일에는 Music Machine에서 공연을 하고, 20일에는 작년에 나갔던 LA Street Scene 페스티벌에 다시 나간다.

 

액슬 : 5,000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몰려왔고, 4곡을 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미쳐있었어. 'Out Ta Get Me'를 부르고 있을 때였는데 애들이 60갤런짜리 기름통을 경찰에게 던지기 시작했어. 다들 미쳐있었다고. 내가 "도시를 찢어버려!"라고 말했으면 진짜 그렇게 됐을지도 몰라. 공연은 소방국장의 명령으로 그만둬야 했어. 전기 시스템이 기름범벅이 되어서 정말 무대에 있다가 다 튀겨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거든.

 

8월 23일. Whisky a Go Go
LA Street Scene 페스티벌

LA Street Scene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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