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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 포럼 번역/1987년

1986년 12월~1987년 3월

1986년 12월~1987년 3월, Appetite For Destruction을 녹음하다

 
1986년 12월부터 버뱅크의 SIR 스튜디오에서 사전 리허설을 진행했다.

마이크 클링크 : 그들을 처음 봤을 때 슬래쉬는 잭슨 기타를 쓰고 있었다. 12월이었고, 할리우드의 SIR 스튜디오 리허설실은 추웠다. 그리고 슬래쉬의 기타 줄은 언제 바꿨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내가 '네 기타 줄 못쓰겠다'라고 말하자 그는 '알겠어, 갈아볼게'라고 했다. 구석으로 가서 줄을 한 번에 자르자 넥이 휘어버렸다. 그리고 다신 조율할 수 없게 되었다. 정말 끔찍했다.

주된 녹음은 1987년 1월에 럼보 스튜디오에서 2주간 이루어졌다. 녹음은 3개월 정도 걸렸고, 87년 3월 말에 끝났다. 'Sweet Child O' Mine'은 한 번에 끝났고, 'Think About You'는 여러 번 녹음했다고 한다.

마이크 클링크 : 많은 사람들이 내게 '걔들 원테이크로 다 끝내버렸지?'라고 묻곤 하는데, 그건 아니다. 그랬더라면 녹음은 2주 만에 끝났을 거다. 그런 일은 없었다. 슬래쉬가 자기 파트를 끝냈을 때, 다른 멤버들은 그 자리에 한 명도 없었다. 다들 본인 차례가 아니면 놀러 나갔다. 항상 말하지만 그 녹음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다섯을 같은 시간에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시키는 거였다.

럼보 스튜디오에서 녹음을 하게 된 건 클링크가 결정한 것이었는데, 밴드 멤버들이 할리우드에서 제멋대로인 생활을 하지 못하게 하려고 결정한 거였다.

스티븐 : 에피타이트 작업을 시작하면서 우린 맨해튼 비치의 호텔에 머물렀는데, 럼보에서 45분 정도 걸리는 곳이었다. 스튜디오에서 왜 그렇게 먼 곳에 있던 건지 모르겠다.

녹음 과정은 체계적이지 않았다.

톰 주토트 : 작업은 밴드가 영감을 받는 새벽 두세 시에 시작됐다. 엔지니어한테 '이게 9시부터 5시까지 하게 될지, 6시부터 자정까지 하게 될진 모르겠다. 밴드가 녹음할 분위기가 되면 전화할 테니 그때 와서 작업해야 해"라고 했다.

슬래쉬 :  새벽 4시까지 밖에 있다가 적어도 오후 12시엔 스튜디오로 왔어. 난 그 어디에도 정착해서 머물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에피타이트를 만드는 동안 완전 떠돌이 생활을 했지. 밤 11시나 12시까지 작업을 하다가 밖에 나가서 놀 곳을 찾아다니고, 잘 곳을 찾아다니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어.

밴드와 마이크는 녹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지 : 스튜디오에서 우리 드러머는 완전 들뜬상태였다.

스티븐 : 항상 난 드럼이 드럼처럼 들렸으면 좋겠다고 말했어. 기계처럼 들리는 걸 원치 않았거든. 아무런 효과를 주지 않고 스네어는 진짜 스네어 드럼처럼, 베이스는 베이스드럼처럼.
 
난 6일 만에 녹음을 다 끝냈지만, 액슬은 보컬을 하나씩 해야겠다고 고집했다. 완벽주의자가 할법한 요구보다 더했다.

마이크 클링크 : 그들은 날것을 원했고, 두 기타리스트들은 상호작용하면서 연주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음반에 대해 얘기했는데, 특히 액슬이 그랬다. 액슬은 리허설 때 카세트를 가져와서 끊임없이 음악을 들었다. 그가 좋아한 밴드 중 하나는 메탈리카였다. 그리고 이지는 딕시 드렉스를, 슬래쉬는 롤링스톤즈, 더프는 미스피츠 스타일의 펑크였다. 스티븐은 앞서 말한 모든 걸 즐겼다.

(기타 녹음을 어떻게 했는지 묻는 인터뷰어에게) 두 개의 슈어 SM57(마이크), 풀텍 EQ 그리고 DBX 160 컴프레서를 썼다. 대부분은 앰프를 만진 거고. 앰프를 조정하고, 마이크 위치를 바꾸느라 부스에서 계속 왔다 갔다 했다. 이지와 슬래쉬 앰프는 둘 다 마이크와 가까이해서 녹음했다. 로랜드 SRV2000 리버브로 거리감과 공간감을 줬다.

정오쯤 슬래쉬부터 시작해서 저녁 8시까지 작업했다. 액슬은 9시쯤 오는 일정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9시가 10시가 되고, 10시는 11시가 됐다. 그렇게 하루 종일 일하게 됐다. 액슬은 늘 그렇듯 지각했다. 난 그들이 뭘 하기까지 마냥 앉아서 기다리지만은 않았다. 스튜디오에 있는 동안 밴드는 작업에 열중했고, 매일 많은 것을 해냈다. 'Appetite For Destruction'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우린 그 앨범을 만들기 위해 정말 열심히 작업했다.

스튜디오 밖은 혼돈 그 자체였다. 기타 믹싱을 하고 있던 어느 오후 더프가 나타났는데, 팔을 붕대로 고정시켜 놓은 상태였다. 생각해 보니 눈에는 멍을 달고 있었고, 절뚝이고 있었던 것 같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음, 계단에서 뛰어내리기를 했어'라고 했다. 그는 누군가의 아파트 맨 윗 계단에서 바닥까지 발을 딛지 않고 뛰어내리기를 했던 것이다. 스튜디오 휴게실은 점점 미쳐갔다. 트랙을 자르고 있을 때 갑자기 땅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스티븐이 뭔가에 화가 나서 소파, 테이블, 냉장고를 넘어뜨리면서 휴게실을 부수고 있었다. 내 주위에서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지만, 난 스튜디오를 떠나지 않았다. 항상 스튜디오에서 일을 했고, 그들을 데려와서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반경 15~20피트 안에서 하게 했다.
 
작업을 끝내고, 클링크는 그들이 대단한 음반을 만들었단 걸 알았다.

마이크 클링크 : 우린 우리가 제대로 하고 있단 걸 알았고, 작업 내내 기분이 좋았다. 러프 믹스를 만들었는데 정말 엄청났다. 이게 명반이 될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하지만 톰 주토트는 스튜디오에서 러프 믹스를 한 번 듣자마자 '마이크, 네 생각엔 이게 얼마나 팔릴 것 같아?'라고 물었다. '2백만 장은 팔릴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는 '틀렸어. 이건 5백만 장 팔릴 거야'라고 했다. 결국 우리 둘 다 틀렸지만. (웃음)


1986년 12월 31일, 신년파티

 
새해 전날 밴드는 Wall of Voodoo, 제트 보이, 제인스 어딕션을 비롯한 여러 밴드와 함께 Glamour에서 파티를 연다.


수익 분담

 
밴드는 1986년 게펜과 계약하기 전, "모두를 위한 하나, 하나를 위한 모두를 위한 법적 체계"를 만들기 위해 변호사 피터 파테르노를 선임한다. 파테르노는 그들에게 파트너십 합의의 필요성을 설명했다. 밴드가 가장 먼저 논쟁한 주제는 저작권을 나누는 거였다. 멤버들이 작곡에 명확하지 않게 참여했음에도, 그들은 모두 똑같이 나누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변호사는 그것을 문서로 작성해 보관했다.

에피타이트를 작업하면서 밴드는 다시 수익 분배에 대해 토론했는데. 이때는 로스 펠리즈에 있는 앨런 니븐 집에서 모였다. 이때 액슬이 다른 멤버들보다 조금 더 받는 것으로 정해졌다. 액슬은 1989년 AFD에서 자신이 41%나 작곡한 것으로 계산됐지만, 여전히 멤버들과 수익을 비슷하게 나눈다고 말한 바 있다. 스티븐 자서전에 의하면, 이때 액슬이 더 큰 지분을 원했고, 스티븐의 5%를 떼 가서 그 결과, 액슬 25%, 스티븐 15%, 나머지 셋은 각각 20%를 차지했다고 한다.

스티븐 : 그건 반드시 해야 하는 거였고, 처음부터 모두 똑같이 나누자고 말해왔었다. 그런데 액슬이 자신의 몫을 바꿨다. 액슬은 더 큰 파이를 원했다. 액슬은 노래를 똑같이 5등분하는 게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본인이 우리보다 더 많은 지분이 있다고 믿었다. 다른 애들은 똑똑했기 때문에 그냥 바닥만 쳐다봤다.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액슬이 그들을 겁주고 있든, 다들 그 자존심을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침묵이란 걸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그냥 닥치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입 다물고 있지 않은 이유는 너무 화가 나서였다. 그래서 즉시 "좆까, 시작부터 함께했고, 나도 너만큼 곡에 참여했어"라고 말했다. 내가 맞았기 때문에 액슬한테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침묵이 흐르고, 큰일이 벌어질게 뻔했다. 여전히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기에, 일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나는 내가 생각하기에 공정한 제안을 했다. "액슬이 가사 대부분을 쓴 건 존나 큰 기여니까, 내 20퍼센트에서 5퍼센트 줄게" 액슬은 고마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오만하고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마치 예상이라도 했던 것 마냥. 그래서 난 방을 둘러봤는데 다른 이들도 날 따라 할 줄 알았다. 하지만 방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일은 다 끝났고, 해결됐다. 액슬은 행복해했고, 나는 "씨발!"이었다. 그래서 액슬한테는 25%, 나머지한테는 각각 20%가, 그리고 나한테는 15%가 돌아오게 됐다.

액슬이 높은 지분을 요구하고, 스티븐이 자기 몫에서 5%를 떼어준 것이다. 그런데 스티븐이 건즈에서 해고되고 했던 RIP와의 인터뷰에서 액슬은 자신이 준거라는 말을 한다.

액슬 : 밴드를 계속하기 위해서 그에게 내 저작권의 일부를 주지 않으면 안 됐었어. 그건 내 인생에서 저지를 큰 실수 중 하나였는데, 그러지 않으면 밴드를 나가겠다고 난리를 피웠어. 1집 녹음을 못하게 될까 봐 걱정돼서 난 내가 그래야겠다고 느꼈어. 결국 난 스티븐이 건즈 앤 로지스에 남게 하려고 큰걸 내줬지. AFD 저작권의 15%를 줌으로써 150만 달러를 줘버렸어.

1987년 데뷔 앨범인 AFD의 크레딧을 위해 밴드는 각 곡에 모든 멤버를 적었다.

더프 : 우린 항상 그렇게 노래를 만들거든.

모든 멤버가 노래에 동등한 기여를 했다는 건 물론 틀린 말이며, 1991년 발매된 UYI I&II의 경우에도 수익을 동등하게 배분하고 있음에도 크레딧에는 꼼꼼하게 표기했다.

더프 : 일루전 앨범에서 누가 어떤 곡을 썼다고 다 적혀있지만, 금전적으로는 여전히 똑같이 나눴어. 난 내가 한 게 자랑스럽고, 잘했다는 걸 알아. 사람들이 날 그냥 베이스 연주자나 곡을 안 쓴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어.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 에피타이트도 동등하게 분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루전 역시 똑같이 나누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마이크 클링크와의 작업

 
액슬 : 마이크 클링크를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그는 우리한테 그토록 원하는 자유를 줬어. 좋은 일이었지. 그리고 그는 스튜디오에서 내 보컬 아이디어 같은 걸 많이 믿어줬어. 그전에는 이렇게 해볼 일이 없었으니까 'It's So Easy"나 "Paradise City"의 하모니 같은 건 녹음하던 밤에 막 떠올랐거든.

스티븐 : 우리 프로듀서인 마이크 클링크가 나한테 와서는 드럼 구성을 바꾸자고 제안했다. 마이크가 "Anything Goes"를 바꿔보자고 하니까 진짜 거슬렸다. "엿이나 먹어. 우리 보고 곡을 어떻게 하라 하지 마" 입술을 내밀고, 발도 구르면서 정말 좆같이 굴었다. 그래도 그의 생각을 받아들였는데 생각보다 좋았다. 내가 틀렸고, 선 넘었다는 걸 처음으로 인정하고, 마이크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정말 미안해"라고 사과했다.

슬래쉬 : 스튜디오에 함께있던 한 두달간 담배를 엄청 피웠었는데 의사한테 "금연하세요"라는 말을 들었대. (마이크는 비흡연자임) 처음 만났을 때보다 15~20살 더 늙어있더라. 앨범 작업을 끝마쳤을 땐 정말 달라져있었어.

건즈는 그 후 밴드의 모든 앨범을 같이 작업함으로써 클링크에게 감사를 표한다.


1987년 3월 16일, 위스키 공연

 
데뷔 앨범을 녹음하면서 건즈 앤 로지스는 어떤 공연도 나가지 않았다. (이지는 3월 7일, 스크림 클럽에서 여러 아티스트와 함께한 밴드 The Loud Ones와 공연을 했지만) 그러나 녹음이 끝난 3월, 두 번의 공연을 한다. 첫 번째는 3월 16일 위스키에서였다. 마크 캔터에 따르면, 막 녹음을 끝낸 상태라 이 날 공연은 데뷔 앨범에 실린 것과 매우 비슷했다고 한다.
 

 


1987년 3월 29일, 록시

 
두 번째 공연은 3월 29일 록시에서 열렸다.

L.A. Rocks의 공연 후기 : 액슬의 높은 목소리는 너무 완벽했고, 전처럼 귀가 아프지 않았다. 리드기타와 어우러지면서 소름이 돋기도 했다. "Nightrain"이 너무 좋아서 다시금 건즈 앤 로지스의 팬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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