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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즈 포럼 번역/건즈 이전

액슬과 이지의 어린 시절

1962~79년, 액슬의 어린 시절

 

1962년 2월 6일, 액슬은 인디애나주 라파옛(후에 액슬은 이곳을 중서부의 지옥 같은 곳이라 말한다)에서 윌리엄 로즈(빌 로즈)로 태어났다. 액슬의 친부모는 샤론.E(母) 윌리엄 B. 로즈(父)이고, 둘은 샤론이 고등학교에 재학 중일 때 결혼했다. 액슬이 3살이 되기 전, 샤론과 윌리엄은 이혼했다. 약 1년 후 샤론은 L. 스테판 베일리와 재혼을 한 다음 액슬의 성을 로즈에서 베일리로 바꿔 윌리엄 베일리가 되었다.

 

액슬 : 다들 알고 있듯이 내 이름은 윌리엄 로즈였어. 우리 엄마가 재혼하고 내 이름을 빌 베일리에서 또 윌리엄 베일리로 바꿨지. 아빠가 엄마한테 내 이름을 그대로 두면 이상한 소리를 들을 것 같다며 바꾸자 했다고 들었어. 그냥 네가 어리다고 생각해 봐, 어딜 가나 "Won’t you come home Bill Bailey"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따라올걸. 근데 나는 그 노래를 커버하고 싶어, 좋아하거든.

 

샤론과 윌리엄(액슬 친부)사이에는 에이미라는 아이가 하나 있었고, 스테판과는 스튜어트라는 아이를 가졌다. 재미있는 점은 Popular 1이라는 잡지가 1988년도 4월호에서 액슬이 본인에게는 두 명의 형제와 두 명의 자매가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잡지사가 저지른 실수였다. 액슬에게 형제자매는 각각 1명뿐이다.

 

액슬은 스테판이 양아버지가 아닌 친아버지인 줄 알고 자라왔으며, 나중에서야 그의 친아버지는 윌리엄 B. 로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액슬 : 어렸을 때 나는 관심받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정말 수줍고 내성적이었다.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지금도 달라진 건 없어.

 

액슬은 스테판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다는 것을 밝혔다. 그는 양아버지와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와 시간이 흐르고 나서 '그가 양육하는 방식에서의 고통'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90년대 초, 액슬은 그의 친아버지와 양아버지 둘에게 학대를 받았고, 그의 어머니는 이를 방관했다고 말한다.

 

스테판과 샤론은 매우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었다.

 

액슬 : 우리 부모님은 광신도셨어. 나는 라디오를 듣는 것조차 할 수 없었지. 학교 대회에서 상품으로 받은 것(라디오)을 항상 숨겨놓았었어. 어릴 때 겪었던 일들이 지금의 나에게 확실히 영향을 준 것 같아. 지금 난 여기 앉아서 D-Cup 잡지(야한 잡지)나 읽고 있으니까.

 

우린 라파옛에서 8마일이나 떨어진 시골 교회를 다녔고, 나랑 내 동생들은 트리오로 노래를 불렀어. 교회에서 피아노도 쳤었지. 일주일에 세 번(일요일 아침, 밤, 수요일 저녁) 교회에 갔는데, 이건 정말 광신도, 펜테코스탈, 지옥의 부활이었어. 나는 외톨이에다가 작은 너드였는데, 이건 우리 부모님이 나에게 이상한 옷을 입히고 바가지 머리로 잘라줘서야. 그거 진짜 창피했어.

 

어렸을 때 라디오를 듣지 못했어. 우리 집에서 락은 악마의 것처럼 여겨졌기 때문이었지. 하지만 나는 6학년 때 라디오를 상품으로 받았고, 그건 빠르게 내 친구가 되었지.

 

부모님의 종교에 대해서 얘기해보자면, 그들은 광신도였어. 물론 지금은 그때 그렇게 행동했던 것을 정말 싫어하시지. 진짜로. [...] 어쨌든 당시 나는 어디도 갈 수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 라디오를 들을 수도 없었고, 일주일간 TV를 보면 그 다음 주에는 TV가 집에 없었고, 한 달쯤 지나면 돌아와 있었어. 이게 계속 반복되었지. 그들은 뭐가 죄악인지 아닌지를 정할 수 없었어. 그 종교는 모든 게 오락가락했으니까.

 

나는 펜테코스탈 교회에서 세뇌를 당했어, 교회나 종교를 반대하진 않지만 'Garden of Eden'에서 말한 것처럼 조직화된 종교는 인간을 조롱한다고 생각해. 내가 다녔던 그 교회는 아동학대자와 위선자들로 가득했어. 이 사람들도 아동학대를 당했던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자신이 겪었던 고통 속에서 신을 찾으면서도 자녀들을 괴롭히며 살고 있었지. 나는 일주일에 3~8번 정도 교회를 나가야 했어. 성경학교를 다니면서도 나는 매를 맞았고, 여동생은 성폭행을 당했지. TV는 일주일 정도 있으면 아빠가 가져다 버렸었어. 왜냐면 그건 악마의 물건이었으니까. 음악을 듣는 것도 허락받지 못했고, 여자들은 모두 악마라고 가르쳤어. 모든 게 사탄이었지. 난 여성과 성에 대해 정말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 처음 여자를 쳐다보았을 때 얻어터졌던 게 생각이 나. 그때 몇 살이었는지, 왜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냥 비키니를 입은 두 여자가 물에서 나오고 있는 담배 광고였어. 멍 때리면서 TV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아빠가 내 입을 때렸고, 나는 바닥에 넘어졌었어.

 


1970년대, 음악에 흥미가 생긴 액슬

 

부모가 음악을 악마의 것이라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도 어린 액슬은 빠른 속도로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액슬 : 다섯 살 때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어. 교회에서 형제들과 함께, 아니면 혼자서 노래를 불렀어. 일주일에 5일을 교회에 다녔고, 거길 가면 라디오를 들을 수 없었어. 나는 엘비스와 찬송가를 듣기 시작했지. 그게 아빠의 레코드 컬렉션에 있던 것들이었고, 그건 들을 수 있게 해 줬거든. 내가 그 음악이 아닌 다른 것을 듣고 있는 걸 아빠가 보면 맞았어. 그 외의 것은 다 악마의 것이었으니까.

 

음악은 가장 친한 친구였어. 그게 전부였고. 그래서 난 음악을 들을 방법을 찾았지. 한번은 친구 데이브가 나한테 전화를 걸고 슈퍼트램프(Supertramp)의 노래를 들려줬는데, 그때 난 데이브랑 대화를 하는 척을 하면서 노래를 들었어.

 

어렸을 때 음악을 많이 들은 것은 가사 때문이 아니라 멜로디와 곡에 담긴 감정들 때문이었다. 가사에 담겨있는 감정들은 나를 이해하는 친구가 되었고, 그때 나는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전까진 아빠가 느끼라고 한 감정 이외에는 그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음악에서 다른 방식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어쨌든 음악은 내 지지자가 되었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은 음악뿐이었지. [...] 가끔 일요일 오후에 라디오를 듣는 게 허락되었는데, 내 생각엔 부모님이 그들만의 시간을 보내려고 라디오를 틀어준 것 같아. 그 소리로 우리가 그 이상의 것을 듣지 못하게 했지. 언젠가 내가 차 뒷자리에서 Barry Manilow의 "Mandy"라는 곡을 따라 부른 적이 있었는데, 그때 입을 맞았던 게 기억나네.

 

나는 엘튼 존한테 영향을 많이 받았어. 어렸을 때 엘튼 존 노래의 악보를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와, 이거 진짜 기술적이네. 연주할 수는 없지만, 그럴싸하게 들리도록 속이는 건 배울 수 있겠네."라고 생각했어.(웃음)

 

모든 건 가스펠로부터 시작했어. 난 70년대부터 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내 라디오에서 모든 것을 들었지. 어느 날 밤 나는 퀸(Queen)을 알게 되었어. 그들은 로큰롤에는 없던 테크닉을 가지고 있었지. 로큰롤과 테크닉의 완벽한 조화였어. 나는 퀸과, 그들의 투어, 그리고 일본에서 거둔 큰 성공을 알게 되었어. 나는 그들의 피아노 악보를 얻었고, 우리 부모님은 멍청해서 내가 연습하는 거에만 집중했지, 내가 뭘 연주하는지는 몰랐어. 나는 퀸이나 비틀즈(The Beatles),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를 연주했어. 부모님은 내가 데일리 레슨을 연습하는 줄 알았고, 굉장히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곤 했지.

 

우린(액슬과 동생들) 교회에서 베일리 트리오였어. 찬송가보다는 조금 더 락같은 70년대 가스펠 히트곡 같은 걸 불렀고, 나는 베이스였지. (낮은 목소리로)"One more time, Jesus." 정말 재밌었고, 진짜 생각만 해도 이상해. 우리는 괴짜들처럼 보였을 거야.

 

그때 오래된 가스펠이나, 70년대 히트곡, 그리고 찬송가를 불렀었어. 나는 하모니를 쌓는 걸 좋아했지. 항상 성가대 연습 때 다른 사람 파트를 불러서 문제를 일으켰지.

 

내가 1학년 때, 난 엘비스 프레슬리 노래 2곡을 부르지 않으면, 길을 건너지 못했어. 그리고 3학년이 되었을 때, 나무 그루터기에 올라가 어린애들을 위해서 차트 40위권이나 엘비스를 부르게 선생님이 시키셨지.

 

5학년 때, 나는 대회에서 라디오를 받았고, 하루종일 새로운 음악을 들으면서 보냈던 게 기억나. 어느 날 레드제플린(Led Zeppelin)의 노래를 들었는데, 수업에 가서 친구들과 그게 뭐냐고 농담을 했었지. 하지만 그날 오후에 나는 구석에 앉아서 그 노래를 다시 듣기 위해 미친 듯이 주파수를 돌렸어. 그 이후로 난 그 짓을 매일 반복했어. 밤에는 베개 밑에 라디오를 숨기고 헤드폰으로 들었지. 아마 그 모습을 들켰더라면, 큰 싸움이 벌어질 게 뻔했어. [...] 문제는 부모님이 라디오를 발견하면 그걸 뺏는 거로 끝나는 게 아니라, 허리띠로 나를 때리기까지 했다는 거야. 한 번은 내가 차에서 Barry Manilow의 'Oh, Mandy'가 흘러나와서 같이 따라 불렀는데, 아빠가 멈춰 서더니 나를 세게 후려쳤었지.

 

아빠는 내가 피아노를 치길 원했었는데, 자기가 어렸을 때 배우고 싶었지만 지금 와서 하기에는 본인이 너무 바빴기 때문에 나한테 시킨 거였어.

 

음, 나는 정말로 내 노래만 연주할 수 있어. 그리고... 진짜 연습할 시간이 많이 없어. 정말 피아노도 사고, 길도 걷고, 일도 더 하고 싶어. 음... 난 정말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는데. 아빠가 강요해서 시작한 거였어. 그는 본인이 피아노 레슨을 못 받은걸 되게 후회했거든. 근데 그는 음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어. 내가 레슨을 잘 받고 있는지 아닌지 몰랐지. 그래서 나는 그렇게 레슨에 집중하지 않았어. 선생님이 있을 때만 피아노를 쳤지. 집에 가면 한 30분 정도는 피아노 앞에 앉아있어야 했는데... 가끔은 몇 시간 동안 앉아있던 적도 있었어. 지금 와서 보니까... 그때 내가 조금 더 노력했다면 더 좋아졌을 거라 생각해.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때 우리 집은 많은 미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그래서 난 그 외의 일들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던 것 같아. 무언가에 전념하기 어려웠지. 그래도 난 피아노 앞에 앉아서 내 감정을 표현하려 노력하는 걸 좋아했어. 피아노를 치는 동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어. 그래서 나는 방해받지 않고 연주할 수 있었지. 하지만 17살 즈음되었을 때, 나는 로큰롤을 치기 시작했고... 우리 아빠는 조금 똑똑해졌지. 나는 피아노로 레드제플린을 연주했는데, 아빤 그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

 

어렸을 땐, 엘비스랑 가스펠 그리고 좀 나이가 들고나서는 70년대 히트곡을 들었고, 몇 년 간은 피아노로 엘튼 존이나 빌리 조엘같은 곡들을 치는 것에 빠져있었어. 그리고 노래 부르길 시작했을 때, 알다시피 하드코어 로큰롤 그러니까 나자레스(Nazareth)의 Dan McCafferty를 진짜 좋아했어.

 

콘서트에는 가지도 못했고, 집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는 제한적이었어. 왜냐면 그들은 나를 거의 항상 지켜보고 있었거든. 10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외출하려면 부모님께 돈을 달라고 해야 했고, 그러면 그들은 날 통제하려 들었어. 정말 끔찍했지. 하지만 이지랑 같이 트라이엄프(Triumph) 콘서트와 Johnny Winter의 공연을 보러 갔었지. 그리고 LA로 떠나고 나서는 공연을 본격적으로 보러 다니기 시작했어.

 

8학년쯤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음악으로 뭔가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어.

 

나는 평생 피아노를 쳐왔어. 레슨을 받긴 했지만, 정말 레슨 시간에만 레슨곡을 연주했지. 일주일 내내 나는 레슨곡 대신 피아노 앞에 앉아서 다른 걸 만들어냈어.

 

액슬이 본인의 것을 만드는 걸 좋아한다는 사실은 액슬의 고등학교 합창단 교사인 Gary Branson에 의해 입증되었다.

 

Gary Branson : 그는 우리가 해야 하는 것보다 피아노로 새로운 곡을 쓰고 싶어 하던 흥미로운 아이였다.

 

1991년, 액슬은 본인이 좋아하는 3곡으로 10cc의 I'm not in love, 레드제플린의 D'yer Mak'er , 그리고 엘튼 존의 Bennie and the jets를 꼽았다. 마지막의 엘튼 존의 곡은 액슬이 퍼포머가 되게끔 했다.

 

액슬 : 'Benny and the Jets'의 분위기, 사운드 그리고 녹음방식은 나로 하여금 무대에 오르고 싶게 만들었다. 그 노래는 내가 스테이지에 오를 수 있게 만들어줬다. 왜냐면 그 곡은 콘서트 무대에 서는 것과, 내 노래가 누군가의 방 안에서 들리는 것을 상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메리카 글램씬과 오래된 크림잡지에서 봤던 클럽 같은 걸 떠올리게 했지.

 

'Bennie and the Jets'를 듣고 나는 큰 곳에서 놀거라고 결정했어. 많은 사람 앞에서 자랑스럽게 연주하고 싶어 졌거든.

 

액슬은 나중에 건즈의 곡을 녹음할 때 여러 음역의 목소리로 불렀고, 그는 오랫동안 다른 목소리들을 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액슬 : 사실 난 제2의 바리톤같아. 성가대 수업 때 다른 사람 파트를 불러서 선생님을 속일 수 있는지 생각하곤 했었거든. 선생님은 절대음감이셨고, 그분의 귀는 레이더 같았어. 그래서 잘 속이려면 조용히 부르거나 했었어야 했어. 나는 다른 목소리를 내서 선생님의 머릿속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지! (웃음) 그분은 왜 베이스 세션에서 소프라노 소리가 들리는지 궁금했을 거야.

 

음악과 성가대에서의 경험을 좋아했지만, 액슬은 가수가 되고 싶어 하진 않았다. 본인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액슬 : 나는 하고 싶은 게 수도 없이 많았어. 다른 애들처럼 처음엔 소방관이 되고 싶었다가, 카우보이, 그리고 모든 게 하고 싶었지. 8학년이 되었을 때, 나는 음악 관련 일을 하고 싶어 했지만 정확히 뭘 하고 싶은지는 한 10년 전까지만 해도 정하지 못했어.

 

또한 1987년에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견딜 수 없다고 말했다.

 

액슬 : 난 성가대였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지만, 내 진짜 목소리가 뭔지 몰랐고 내 능력을 확신하지 못했어. 노래하는 건 정말 사랑했지만, 이지와 했던 밴드의 녹음본을 들으면 '내 목소리가 저렇다고? 형편없어!'라고 생각했어.

 

액슬의 노래에 대한 불안감은 1988년 12월 인터뷰에서 나타날 정도로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다.

 

액슬 : 나는 정말 겁이 많고, 때로 자신감도 없지만, 매일 무대에서 내 감정을 전달할 방법을 찾아야 했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노력해야 했지. 나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도전적인 일이었어... 마치 스크린 속 배우가 되는 것 같았어. 다른 점은 내겐 주어진 배역이 없고, 스스로를 연기해야 한다는 거였지. 나는 항상 음악을 넘어서서 내 감정을 표현할 방법을 찾고 있어.

 

그는 본인의 목소리에 확신이 없었지만, 뮤지션이 되고 싶었다.

 

액슬 : 난 항상 밴드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가수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 내가 좋은 보컬이라고 전혀 생각도 못 했거든. 하지만 록밴드의 멤버가 되기 위해서 뭐든 할 준비는 돼있었어. 그리고 나만 음정이 틀리지 않고 제대로 불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내가 보컬이 되고 말았지. 처음에는 키보드를 쳤고, 그리고는 베이스, 결국 노래를 부르게 된 거야. 지금 생각해 보면 꽤 잘된 일이지.

 

그의 첫 콘서트 관람은 17살 때 Johnny Winter와 트라이엄프의 콘서트에 간 것이었다.

 

성가대 액슬
베일리 트리오


1966~84년, 건즈앤로지스 이전의 트레이시

 

트레이시 건즈(본명 Tracy Richard Irving Ulrich)는 1966년 1월 20일 태어나 할리우드에서 자랐다.

그의 첫 밴드는 드러머인 Rob Schneider와 함께한 Pyrrhus였고, 나중에 베이시스트 Ole Beich가 들어왔다. 라즈 큐는 Pyrrhus 멤버들과 친한 사람이었고, 그는 나중에 LA Guns와 초기 건즈를 관리한다.

 

큐는 Shire에서 베이스를 치고 있던 이지 스트래들린을 만났고, 후에  이지는 Shire를 나가고 액슬이 보컬로 있는 Rose에서 기타를 친다. 라즈는 Shire의 공연을 보러 갔다가 같은 날 공연을 한 Rose를 봤는데, 그게 라즈가 액슬을 처음 본 것이었다. 이후, 마이크 자고즈가 라즈에게 기타리스트 슬래쉬를 몇 년 전 기타 대회에서 트레이시를 이긴 사람이라고 소개해준다. (슬래쉬도 다른 기타리스트에게 짐)

 

트레이시가 Pyrrhus를 나가고, 새로운 밴드 LA Guns를 Ole과 Rov과 함께 결성한다. 큐는 LA Guns의 매니저가 된다.

 

LA Guns의 매니저였던 큐는 액슬을 만났고, 그는 액슬을 LA Guns의 첫 번째 보컬로 영입하려 했지만 액슬이 거절했다. 몇 주 뒤 액슬의 밴드였던 Hollywood Rose가 해체했고, 약간의 망설임 끝에 액슬은 LA Guns에 들어왔다. 액슬이 LA Guns에 들어오기로 결정한 큰 이유는 트레이시가 액슬에게 메탈보다는 블루스 기반인 밴드가 될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1984년 할로윈에 액슬은 LA Guns에서 잘렸고, 트레이시와 액슬은 건즈를 만들었다.

 

Pyrrhus의 모습


1970년대, 액슬의 학창 시절과 반항

 

액슬의 (오클랜드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이었던 Billy Johnson은 그가 "아주 총명하고, 정말 상냥하며 항상 미소 짓는 아이였지만, 자칫 방심하면 수업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만다"라고 말했다.

제퍼슨 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친 Sue Ristau는 이렇게 말했다.

 

Sue Ristau : 나는 그가 활동적이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내 기억에 액슬은 점심시간 이후에 학교에 와서 수업을 들었었는데, 교실로 뛰어 들어왔던 게 생각납니다. 그는 예술을 좋아했고, 잘했었죠. 여러 번 빠졌어도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아이들보다 잘했었습니다.

 

9학년 과학 교사인 Bill Lane은 액슬을 떠올리며 바지에 개미가 들어간 것처럼 교실 안을 돌아다녔다고 했다.

 

누군가 액슬에게 그의 학교 성적을 물으면, 그는 반 배치 고사에서 항상 상위 3%에 들었다고 답했다. 그가 말하듯이 올 A를 받았지만, 가만히 있지 못하는 반항적인 성격으로 인해 성적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액슬 : 나는 항상 A를 받았었고, 재미없어졌어.

 

액슬은 11학년 때 중퇴하고, 다시 돌아갔지만 또 중퇴했다.

 

액슬 : 나는 학교생활을 할 수가 없었어. 책을 읽고,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 같은 전혀 재미없는 것들을 해야 했거든.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것들 말이야. 그래서 난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내가 하고 싶은 그림을 그리고, 도서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 내가 배우고 싶었던 걸 스스로 배우기 시작했어.

 

또한 그는 Metal Edge 잡지에서 학교를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액슬이 학교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이유 중 하나는 다른 아이들과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학교 아이들로부터 괴롭힘 당하다

액슬은 자신을 '전혀 인기 없다'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의 오랜 친구인 Monica Gregory는 그가 여러 이유로 정말 많이 혼났다고 말했다.

크로스컨트리 코치는 액슬의 팀 멤버들이 그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서 테이프를 붙였고, 라커에 넣어버리기도 했었다고 했다. 액슬은 7학년 때 12학년 선배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고 자신의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고 털어놓았다.

액슬이 유명해지고 나서, 제퍼슨 고교의 동창회 모임의 멤버가 그에게 동창회에 오라는 연락을 했지만, 액슬은 그들에게 자신은 학급에 속해있던 적이 없었으며, 자신의 주소를 삭제하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다.

 

변호사의 꿈

액슬은 뮤지션을 꿈꾸기 전, 변호사라는 장래희망이 있었다.

 

액슬 : (변호사가 되고 싶었던 게 맞냐는 질문) 음악을 할지 학교에 갈지 이 두 선택지가 있었는데, 거기서 음악을 고른 거야. 내 동생은 법학과를 졸업했어. 법은 정말 흥미로워, 어디에나 누군갈 고소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거든. 법에 대해 좀 공부해서 스스로한테 의지하고 싶어.

 

만약 내가 이걸 안 하고 있었다면, 난 법조계에 있었을 거야. 근데 지금은 공부할 시간이 없으니 뭐. 그래도 해보고 싶어.

 

한때 변호사가 될 거라는 열망이 있었어. 난 어려운 도전일수록 좋거든.

 


1962~80년, 인디애나에서의 이지 스트래들린

 

이지 스트래들린은 1962년 4월 8일 제프리 딘 이즈벨로 태어났고, 그에게는 두 명의 형제가 있다. 그의 아버지는 조각가였으며, 어머니는 전화 회사에서 일했다. 그들은 이지가 3학년일 때 이혼하고, 이지는 어머니와 함께 인디애나로 이사 갔다.

 

액슬과 비슷하게 이지 역시 인디애나에 대해 좋은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이지 : 엿이나 먹어. 인디애나에서 있었던 일 중 좋은 건 없었어. 아무 가치도 없고, 쓸모없다고. 좆같아. 내가 인디애나 출신이란 건 내 커리어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지.

 

하지만 몇 년 뒤, 인디애나로 돌아왔을 때 그는 술에 취해서 했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을 변명했다.

 

이지 : 1980년부터 87년까지 난 캘리포니아랑 건즈에 있었어. 85년인가 86년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정말 술에 취해서 했었지. 인디애나 얘기가 나왔고, 헛소리를 지껄였어. 그땐 스무 살이었는데 좀 더 생각하고 행동했었어야 했어.

 

음악과 가족

음악은 이지의 가족과 그의 어린 시절의 중요한 것이었다.

 

이지 :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은 매주 집에서 파티를 하곤 했어. 밤이 깊어지자 밴드는 연주를 그만두었고, 나는 가서 드럼을 두드렸지. 8살에서 9살 정도였을 때 일이었어.

11살인가 12살 때, 한 친구가 있었는데 걔네 형은 훌리건 같았어. 바이크를 타고, 항상 술에 취해서 싸우고 있었거든. 그들은 뭔 밴드를 하고 있었고, 커다란 농가에서 연주했었어. 진짜 커서 비행기 격납고 같았지. 난 거기 서서 좆같은 얼굴을 한 채로 시간이 좀 지나서 걔네들이 취하기를 기다렸지. "올라와서 드럼 좀 쳐봐!"라는 말이 들리면 드럼을 쳤어. 이거 말고 내 삶은 정말 지루했어.

나는 드럼으로 시작해서 베이스, 그리고 기타로 옮겼어. 베이스는 1년 정도 쳤는데, 그걸 친 건 가지고 다니기 쉬웠기 때문이야. 기타를 친 건 고작 5년밖에 안돼. 난 베이스를 치고 싶은 기타리스트가 아니라, 성공하지 못한 드러머야.

진짜 어렸을 때 집에 락밴드가 공연하러 왔었는데, 난 항상 그 사람들이랑 어울렸어. 드럼을 치는 모습이 정말 멋있었어. 정말 행운아였지, 그런 걸 보면서 자랐으니까 말이야. 난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거기에 빠져있어.

고등학생 때엔 내가 리드싱어가 된다면 멋질 거라고 생각했어. 파티에서 반 헤일런의 곡을 몇 개 불렀었는데, 그때 엄청 취해있어서 노래를 제대로 끝냈는지도 기억이 안 나.

난 공공주택에 살았었고, 이웃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었어. 롤링스톤즈, 밥 딜런 그리고 핑크플로이드 레코드 컬렉션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래서 난 그런 60년대 음악을 들을 수 있었지. 70년대 후반에는 펑크에 빠졌고, 라몬즈를 진짜 좋아했어.

 

Ju Ju Hounds와 함께한 첫 번째 레코드에 수록된 'Train Tracks'는 그의 자전적인 곡으로 이지는 철로에서 대마초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것들을 묘사했다.

1992년 9월, 이지는 자신의 첫 기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지 : 부모님은 내가 대학에 진학하길 바라셨어. 난 신경도 안 썼지만! 난 드럼을 치고 있었어. 그래도 엄마는 내 편이었지만, 아빠는 정말 회의적이었어. 내가 첫 번째 일렉기타를 집에 가져왔을 때, 아빠는 그걸 얼마에 샀냐고 물었고 내가 백 달러라고 대답하니까 돈 낭비라고 했었지.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그때쯤 부모님이 헤어지셨고, 그 무렵 즈음 일렉 기타를 사 가지고 아빠를 보러 갔던 기억이 나. 그때 기타를 보고 "대체 왜 기타를 사서 돈을 낭비했니? 넌 이걸로 1달러도 못 벌거다."라는 말을 했고, 난 어린애처럼 화가 치밀었어. 지금도 여전히 그를 보면 그 일이 생각나서 화가 나.

 

어린 시절 했던 밴드에 대해선 이렇게 얘기했다.


이지 : 기타를 치던 이웃이 있었고, 난 드럼을 쳤었으니까 오후에 우리 엄마 차고에서 시간을 보냈어. 그땐 락이 아니라 컨트리나 팝 히트곡을 연주했지. 클럽에 들어갈 수 있는 나이는 21세 이상이었어. 고등학교에서도 할 수 있긴 했지만, 난 그게 너무 싫었고 우울했어. 거기선 발전할 수 없었거든...

 

이지의 가족은 신앙심이 특별히 깊지도 않았고, 이지는 교회에 갔던 것을 기이한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라파옛에서 자라다

이지의 부모님은 그가 10대였을 때 헤어졌고, 이지는 어머니와 함께 더 큰 도시인 라파옛으로 이사 왔다.

이지 : 거기서 자란 건 정말 좋았어. 법원과 대학, 강과 철도가 있었어. 작은 마을이라 할 건 딱히 없었지만. 우린 바이크를 타고 대마를 피우고, 사고 치고 다녔지. 사실 '비비스와 버트헤드' 같았다고 할 수 있지.

 

학교에서

뮤지션지에 따르면 이지는 학교에 잘 다니지 못했고, '대마초 연기로 자기 주변에 벽을 쌓았고, 1979년 D학점으로 가까스로 졸업했다.'고 한다. 사실 이지는 1980년에 졸업했다. 그 해 이지는 일찍 캘리포니아로 떠난 기타리스트 친구로부터 캘리포니아 생활의 장점과 캘리포니아산 대마초 샘플 몇 개가 담긴 편지를 받는다. 그리고 그 해 여름 18세의 나이에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이지 : (자신이 좋은 학생이었냐는 질문) 아니. 난 그냥 그림 쪽에서만 뛰어났어. 항상 짧은 만화를 그렸고, 아직도 MAD 뒷면에 있는 알 재피 만화 스타일을 좋아해.

 

이지라는 이름은 제프리의 중학교 때 별명이었다.

 

마약 경험에 대해 얘기한 이지.

이지 : 15살 때 firecracker(대마를 땅콩버터 크래커와 함께 구운 것)를 하기 시작했어. 처음엔 아무런 느낌도 안 나서 세 판이나 해치우고 코카인도 했어. 고등학생 때는 LSD도 조금 했어. 우린 블루버드랑 스피드(각성제)를 했고, 고등학생 시절을 완전 취한 채로 보냈지.

 

어릴 때 했던 일

이지 : 나는 15살 때 세차장에서 일했어. 차가 나오는 파트였고, 차를 말리는 역할이었지. 겨울에는 바람이 차게 불었고, 체감상 영하 10도에서 20도 정도였는데, 아침 대여섯 시에 일어나서 나가는 건 정말 힘들었어. 추워서 수건도 얼었는데 그걸 닦고 있는 걸 생각해 봐. 제대로 닦이지도 않는다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정직한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데에는 소질이 없었어. 또 나는 피자집에서도 일했었는데, 그건 재밌었어. 일처럼 느껴지지도 않았고, 일찍 퇴근할 수도 있었어. 사실 피자 만드는 것도 재밌었어. 만약 내가 다른 직업을 구해야 한다면, 아마 피자리아에서 일하거나 아니면 세차장 맨 앞쪽에서 일할 거야. 앞쪽은 청소기로 먼지를 빨아들이는 일을 하는 곳이거든. 아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따뜻하고 음악이 흐르는 피자집에서 일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인디애나를 떠나다

이지 : 학교에 안 나간 날엔 연습을 하고 있었어. 라파옛에서 괜찮은 밴드를 만들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안 됐어. 졸업하고 나니까 '젠장, LA로 가야겠어. 거긴 날씨도 더 좋고, 모든 게 다 있으니까'라는 생각이 들더라고.

 

나는 다시 돌아올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18살이었고, 그런 깊은 생각은 안 했어. 돈과 짐을 다 챙겼으니 가서 밴드를 하고 해변에서 햇빛이나 쬘 생각이었어.

 

그는 시카고와 인디애나폴리스를 먼저 가본 후, 낡은 자동차에 드럼을 챙겨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액슬, 경찰과의 충돌

 

액슬은 라파옛에서 경찰들과 수도 없는 마찰을 일으켰다. 롤링스톤지에서 서술하길, 그는 라파옛의 비행 청소년이었고, 20번 넘게 체포되었으며 3개월간 수감되었다고 한다. 또한 국선 변호사를 믿지 못해서 스스로를 변호했다고 한다. 후에 액슬이 말하길, "나는 어디서나 누군가와 다툼을 벌였다. 어린 시절을 완전 잘못 보냈었다."

 

액슬 : 난 무리에서 가장 미친놈이었지만, 또 가장 똑똑했기 때문에 애들은 날 리더로 대해줬어. 하지만 걔들은 나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지.

 

나랑 내 친구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키고 다녔어. 그게 정말 재미있었거든. 그러다가 감옥에 갈 거라는 걸 깨달았어. 내가 어떤 남자와 싸웠고, 어쩌다가 그와 친해져서 그가 고소를 취하했지만, 법원은 그러지 않았어. 그들은 날 감옥에 넣고 싶어 했고, 결국 그 일 말고 다른 일로 나는 3개월간 수감되었지. 출소하고 나서도 형사들은 내가 뭘 하기만 하면 잡아내려고 했어. 뒷마당에서 술을 마셔도 체포했었다고.

 

Tom Leach 경찰서장은 액슬이 언론에 과장되게 말했다고 주장했다.

 

Tom Leach : 어디까지나 라이트급이었어요. 그 시절 몇몇은 진짜 헤비급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그 이름을 들었을 때, '빌이 누구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Journal & Courier(신문)는 인디애나에서의 액슬의 전과를 확인했고,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다.

 

액슬은 티페카누 카운티 감옥(라파옛에 위치)에서 공공장소에서의 폭력으로 10일간 수감되었었다. 또한 청소년 시기에 4번이나 체포되었다.

 

16살이 된 액슬은 집에서 쫓겨나 외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액슬 : 결국 마약과 술, 내가 하지도 않은 일들로 기소당했고, 집에서는 머리를 자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쫓겨났어. 내 머리 그렇게 길지도 않았거든, 귀밑으로는 내려오지도 않았어.

 

난 16살에 쫓겨났어. 부모님은 머리를 자르라 했는데, 거기다 대고 싫다 했더니 나가라고 하더군. 그래서 그러겠다고 했지.


1970년대, 이지와 액슬이 친해지다

 

이지 : 액슬이랑 나는 15년 동안 알고 지냈어. 우린 중서부에서 같이 자랐고, 아무것도 안 하는 밴드 두어 개를 같이 했었지. 액슬이랑 가사를 같이 썼었는데, 걔는 진짜 많은 가사를 써왔어. 그런 것들이 우리를 여기로 올라오게 했고, 재밌었지.

걜 처음 봤을 때 진짜 미친놈인 줄 알았어. 싸우고 뭘 부수는 데만 열중했거든. 누군가 걜 잘못 쳐다보면, 걘 그냥 싸움을 시작해 버리는 놈이야.

액슬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억은, 걔를 제대로 알기 전의 일인데. 8학년인가 9학년이 된 첫날, 난 교실에 앉아있었는데 책들이 날아다니는 거랑 소리 지르는 걸 보고 들었어. 그리고 걔, 액슬이 선생들을 피해 복도를 뛰어다니고, 선생들은 걜 쫓아다니고 있었지. 그날 처음 걜 본 거야. 이건 절대 잊지 않을 거야.

나한테 진짜 인기 많고 보수적인(redneck) 사촌이 있었는데, 나랑 액슬의 머리가 길다는 이유로 우릴 계속 괴롭혔어. 그들은 동네에 스케이트보드 공원을 지었는데, 존나 큰 사건이었지. 우린 항상 보드를 가지고 거길 갔어. 재밌는 건 액슬은 돈을 갖고 있었고, 난 항상 길바닥에 있었다는 거야.

우린 엔젤시티, 라몬즈 곡을 커버했고, 에어로스미스도 커버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어. 드럼연주자인 나에게는 쉬웠지만, 그때 우리 기타리스트는 레드제플린이랑 러쉬에 더 빠져있었거든. 액슬이랑 난 라몬즈나 엔젤시티, 하드락 같은 거를 더 좋아했는데.

우리 둘이 17살 때, 항상 인디애나 뒷길을 운전하고, LSD를 하고, Queen II 카세트를 들었던 게 생생하게 기억나.

(왜 액슬이랑 함께했냐는 질문) 시발 내가 그걸 알면 (웃음) 난 그걸 항상 자문하고 있어. 학교 첫날 책이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어떤 남자애가 도망가는 소동이 있었어. 나중에 그게 빌, 액슬이란 걸 알게 됐지. 나중에 걔랑 운전 교육 수업을 같이 들었는데 -걘 존나 끔찍한 운전사야- 그렇게 만났어. 난 걔가 노래를 잘할 거라고 생각했어, 미친 새끼니까 완벽한 보컬처럼 보였거든. 걜 설득했어야 했는데 처음엔 잘 안 먹혔어. 몇 번은 그냥 와서 서있다 가기도 했고, 노래를 부른 적도 있었는데 그러면 사흘 정도는 못 봤지! 뭐 몇몇은 지금도 그대로네, 그렇지?

인디애나에서 계속 멤버들을 바꾸면서 잘해보려고 노력했었어, 물론 연주할 곳은 없었지만.

액슬 : 이지랑은 15년을 함께 했어. 걔는 스케이트를 탔었고, 드러머였지. 8학년 때 만나서 놀기 시작했던 것 같아.

이지와 액슬은 펑크에 빠졌지만, 라파옛의 바에는 컨트리나 커버밴드만 섰었다. 그리고 둘은 개러지 밴드를 하기도 했다.

이지 : 밴드를 만들어야지란 생각을 했을 때, 카리스마 있는 보컬이 필요하단 걸 깨달았어. 액슬은 멋있고, 사납고, 학교에서 쫓겨났고, 개인적인 문제도 많았어... 우린 라몬즈, 테드 뉴전트, 비틀즈 같은 두명의 헝가리 기타리스트 형제랑 밴드를 만들었는데, 한 명은 완전 정신이상자였고, 찰스 맨슨같았어. 액슬은 베이스를 쳤었는데, 아무튼 거실에서 로버트 팔머랑 비틀즈 노래를 같이 연주하는 건 좀 이상했어.